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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로와 김일손(3)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기사입력  2019/11/18 [10:34] ⓒ IBN일등방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조선의 대표적 간신 유자광(1439~1512)은 은유로 가득 찬 「조의제문」을 연산군에게 상세히 해설하면서 김종직이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아뢰었다.

유자광은 일찍이 예종 즉위년(1468년) 10월에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죽였다. 남이가 지은 시 중 ‘남아 이십 세에 미평국(未平國,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을 미득국(未得國,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조작하여 남이가 역모했다고 고발한 것이다.  

이런 조작의 달인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이 글은 겉으로는 초나라 회왕을 조문하는 듯하나  실은 노산군을 조문하는 글입니다. 정축년 10월은 노산군이 죽은 때이고, 항우는 세조에 비한 것이며 회왕은 노산을 가리킵니다. ‘이리처럼 탐욕하여 관군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이리 같은 세조가 김종서를 죽인 것을 비유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노산이 왜 진작 세조를 제거하지 않았냐?”라는 뜻입니다”라고 구구절절 풀이했다. 

유자광의 설명을 듣고 난 연산군은 “이 자들은 속으론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세조부터 성종까지)을 내리 섬겼으니, 생각할수록 두렵고 떨리는구나.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윽고 대신과 대간들이 연산군 앞에 모여 이 문제를 논했다. 대신들은 "지금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니,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이들은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땅히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하소서”라고 고했다. 심지어 김종직의 제자로 거론되던 표연말·홍한 등도 극형을 주장했다.

그런데 사헌부 집의 이유청과 사간원 사간 민수복 등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듣고 연산군은 “김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이렇게 말하니 이는 김종직을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당장 이들을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고 명했고. 집의 이유청 등은 그 자리에서 붙잡혀 형장 30대를 맞았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이리하여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었고, 7월 27일에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은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으며, 이목·허반도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이날 대낮부터 캄캄하여 비가 물 쏟듯이 내리고, 큰바람이 동남방에서 일어나 나무가 뽑히며 기와가 날리니, 성안의 백성들이 놀라서 넘어지고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울러 표연말·홍한·정여창·종친 무풍정 총(摠) 등은 난언(亂言)을 범했고, 강경서·이수공·정희량·정승조 등은 난언임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 밖으로 내치고, 이종준·최부·이원·이주·김굉필·박한주·임희재(간신 임사홍의 아들)·강백진·이계맹·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어 국정을 농단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였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리고 3천 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

또한 어세겸·이극돈·유순·윤효손 등 실록청의 책임자들은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므로 파직되었다.

김일손이 사형당하는 7월 27일에 연산군은 ‘백관이 모두 가보게 하라’고 명하고,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고유하고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했다.  

능지처사 당한 김일손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관이었고, 세조의 왕위 찬탈과 비행 그리고 훈구와 세도가의 부패와 탐욕을 실록에 기록함으로써 올바른 역사를 후대들이 기억하도록 했다.  

『패관잡기』는 “계운(季雲, 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어 죽었다”고 애석해 했고, 칼 찬 선비 남명 조식(1501~1572)은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평했다.

탁영 김일손은 34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15세기 후반 조정의 비정한 정치현실을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비판했고 직필로 역사투쟁에 나섰다. 김일손은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내일이 없고, 올바른 기록이 없으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할 수 없다’는 투철한 역사관을 가지고 조선왕조실록에 남기기 위해 사초(史草)를 썼던 인물이다./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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